외눈박이
물고기
사랑/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비목(比目);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물고기
사실
외눈박이 물고기는 시인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당나라
시인 '노조린'이란 사람의 시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물고기인 '비목어(比目魚)'란 물고기를 말하는
것이다.
한쪽
눈이 없었던 이 물고기는 다른 한쪽면을 볼 수 없어 무척이나 불편했답니다.
그렇게
내내 슬픔에 잠긴채 살아가다가 자신처럼 눈 하나를 잃은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한
겁니다.
이렇게 서로의 처지를 잘 아는 둘은 꼭 붙어 다니며
서로에게 부족했던 한쪽 눈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마치 두 눈을 가진 물고기 처럼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짝이 죽게 되자,
남아있는
다른 외눈박이 물고기는 그의 주검앞에서 언제까지나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짝
옆에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서까지 옆에 있는 그 물고기를 칭송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소금/류시화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 간다. 버릴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나비/류시화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신비의 꽃을 나는 꺾었다 / 류시화
세상의
정원으로 나는
걸어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 둥근 화원이 있고 그 중심에는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 꽃은 마치 빛과 같아서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나는 둘레에 핀 꽃들을
지나 중심에
있는 그 꽃을 향해
나아갔다
한낮이었다. 그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누구의 화원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그것은 나를 향해 저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듯했다
밝음의 한가운데로
나는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눈부셔
하며 신비의 꽃을
꺾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갑자기 화원 전체가 빛을
잃고 폐허로 변하는
것을
둘레의 꽃들은 생기를
잃은 채 쓰러지고 내 손에 들려진
신비의 꽃은 아주
평범한 시든 꽃에 지나지
않았다

길가는 자의
노래/류시화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패랭이꽃
/류시화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따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밝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에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류시화 본명: 안재찬
1958년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80년-1982년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1983년-1990년 작품활동 중단,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 (이 기간 동안
명상서적 번역작업을 함) 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들 체험.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인도여행. 오쇼 라즈니쉬 명상센터 생활. 1988년-1991년 가타 명상센터
생활. 1992년-1993년
제주도 생활. 1994년
태국, 스리랑카, 인도, 네팔, 히말라야 여행.
<저서>
시 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명상집:《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민들레 사랑하는 법》 수필집:《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딱정벌레》《달새는
달만 생각한다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번역집:《성자가된 청소부》《장자, 도를 말하다》《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등 40여권 번역

11.JANURY.2014 story by j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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