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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좋은* 시

바람의 찻집에서...류시화

 

 

 

 

 


 


 

바람의 찻집에서....류시화 바람의 찻집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지 긴 장대 끝에서 기도 깃발은 울고 구름이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가장 먼 데서 날아온 새에게 집의 안부를 물었지 나 멀리 떠나와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내며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날아간 날개들에게서 손등에서 녹는 눈발들과 주머니에 넣고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불꽃의 씨앗들로 모든 것이 더 진실했던 그때 어린 뱀의 눈을 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길 떠났으나 소금과 태양의 길 위에서 이내 질문들이 사라졌지 때로 주머니에서 꺼낸 돌들로 점을 치면서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지 탄생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어떤 계절의 중력도 거부하도록 다만 영혼을 가볍게 만들었지 찰나의 순간 별똥별의 빗금보다 밝게 빛나는 깨달음도 있었으나 빛과 환영의 오후를 지나 가끔은 황혼과 바람뿐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고독할 때면 별의 문자를 배웠지 누가 어둔 곳에 저리도 많은 상처를 새겼을까 그것들은 페허에 핀 꽃들이었지 그러고는 입으로 불어 별들을 끄고 잠이 들었지 봉인된 가슴속에 옛사랑을 가두고 외딴 행성 바람의 찻집에서

 

 

 

 

 

안개 속에 숨다....류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바람 부는 날의 풀....류시화



바람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4.January.2014

조용필/바람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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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효(J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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